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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충청북도 옥천 척화비, 도지정문화재

by 명천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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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척화비

대전에서 옥천으로 가는 길에 삼양사거리가 있다. 지금은 금산과 보은을 잇는 도로, 4차선인 대청로가 만들어져 주로 이용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삼양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보은을 다녔었다.

 

대전과 옥천, 금산과 보은이 연결되는 교차로이니,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 같다. 사거리 가까운 곳에 옥천척화비가 서 있다.

 

옥천-척화비
옥천 척화비 전경

이 비는 1866년 고종(高宗)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고종 8년의 신미양요(辛未洋)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興宣大院)이 1871년 4월에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양인들을 배척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출처:옥천군청)

옥천-척화비
옥천 척화비

척화비가 서 있는 곳은 북향에 음지이다 보니, 쌓인 눈 그대로였다.

가까이 가서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지만, 글씨가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여 읽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척화비로 올라서는 계단 옆 안내판에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 4-4

서양 제국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고종 8년(1871)에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는 글을 반포하여 쇄국의 의지를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고종 8년(1871)에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하자, 이들을 물리친 후 더욱 쇄국을 다지고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경계토록 하였다.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는 팔아먹는 행위이다.”라고 하는 12자를 큰 글씨로 쓰고, 그 옆에는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고 작은 글씨로 새겼다.

 

그 후 고종 19년(1882)에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자, 일본 공사가 요구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이 비석은 땅에 묻혔다가 뒤에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6.25 때에 사람으로 오인되어 총을 맞은 흔적이 여러 곳에 보인다. 1976년에 주변을 정리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지나간 역사를 현재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설령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배경을 알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그리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 등 관계를 원만하게 갖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어는 정도의 행복과 안전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지금 자신의 관계는 어떤가. 그리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화친을 할 것인가, 쇄국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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