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석탑 기행, 정림사지, 장하리, 무량사
대전 한밭도서관에서 탑과 문화유산에 관한 내용을 2회 공부하고, 3회 차에 '문화유산 인문학 기행' 답사 기행을 떠난다. 논산을 지나 부여 정림사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백제초등학교 뒤를 지나 매표소까지 조금 걸어여 한다.
유익한 강의를 해주셨던, 류호철 교수님(안양대학교, 문화재 정책 전공)의 풍부한 해설은 구석구석까지 눈길을 끌었다. 탑뿐만 아니라, 불상, 건축물 등 어찌나 해박한지 함께 한 분들은 귀 호강을 했다.
정림사지에서는 오층석탑과 석불좌상을 중점으로 탐방이 진행되었다. 오늘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상처였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하여 승리한 후, 석탑에 승자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 흔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니, 슬픈 역사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정림사지'라는 이름은 어떻게 찾았을까
백제 사비도읍기(538~660)에 건립된 사찰로서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내부의 중심징 자리 잡고 있다.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한 백제가람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고려시대(1028)에 제작된 기와명문을 통하여 정림사지라 불리고 있다.
-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역사를 바꾼 기와 한 장
일제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 당초’라고 쓰인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졌다. 그 이후로 이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 멀리서 보면 더 멋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세부 구성 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석탑에 비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정돈의 형식미와 세련되고 완숙한 미를 보여준다.
또한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낙수면의 내림마루 등에서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하였고,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 슬픈 역사로 남아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상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과거에 ‘평제탑’이라 불리었다. 백제 사비성을 침공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승전기공문인 ‘대당팽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기록이 남아 있으면 된다. 기록이 없으면, 발굴조사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된 것이 출토되어야 한다고 한다.
소정방이 석탑에 기록한 것만을 보고 평제탑으로 불리어지다가, 출토된 기와 한 장에 기록된 것으로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 파괴와 마멸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축 선상에 놓여 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긴 어렵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부여 장암 장하리 삼층석탑(보물)
이곳은 한산사라는 절터로 알려져 있지만, 탑만 남아있고 관련 기록이 없어서 지명을 따라 장하리 삼층석탑이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석탑을 중심으로 북, 동, 남쪽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사찰의 방향은 서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옆에는 민가가 한 채 들어서 있다.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더라도 상징적으로 모셨다고 여겨진다. 부여 장하리 삼층 석탑은 고려 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이다.
석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영향을 받은 백제계 석탑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옛 영토였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이와 같은 석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후백제 또는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들이 후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31년과 196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탑 안에 모셔져 있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931년에는 1층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1962년에는 2층 몸돌에서 사리를 담은 은병과 금동병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국립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부여 만수산 무량사
무량사 주차장에서 내려 일주문을 지난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작은 천을 건너는 다리, 극락교를 건너면 무량사 천왕문이다. 천왕문 오른쪽 방향에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 쓸쓸하게 남아있다.
무량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의 불전과 30여 동의 요사와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1623-1649 재위) 때 진묵 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무량사는 2층의 극락전을 중심 불전으로 하는 아미타 사원이다. 극락전의 앞에 오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동쪽에 명부전, 서쪽에 영산전이 있다. 주변에는 도솔암과 태조암 등의 암자가 있다.
-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은 극락전 앞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신라 방식의 탑이 2층인 것과 달리 단층이다. 탑신은 지붕들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오층을 이루고 있다.
몸돌은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적이다. 지붕돌인 옥개석 역시 높지 않고 수평을 이루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 끝이 살짝 올라가 있는데, 이는 백제의 양식과 비슷하다.
이처럼 이 탑은 백제와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71년 해체 수리를 할 때, 탑신에서 고려 시대 금동 아미타 삼존불상과 사리 장치, 금동 관음보살 좌상이 나왔다.
- 부여 무량사 극락전(보물)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무량사의 중심 불전으로서 한국에는 흔치 않은 2층 불전인데,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층 구분 없이 하나로 트여있다.
불전 내부에는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주불인 아미타불은 극락전이 중건된 연대와 같은 인조 11년(1633)엥 조성된 것이며,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적 가치가 높다.
-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부여 무량사 석등은 통일 신라 시대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등이다. 석등은 절의 탑이나 건물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밝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여에 있는 석탑을 둘러보았다. 부여의 중심지에 위치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아담한 장하리 삼층석탑은 시골 야산 아래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 오층석탑은 그래도 찾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어디에 위치해 있든 탑이 가지고 있는 멋을 간직하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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