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로 들여다본 박팽년 유허비
우암사적공원 앞에 서 있는 게시판에 대전 동구 가양 2동 마을 지도가 있다.
우암도사 가양도령과 떠나는 가양2동 마을여행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가양동에는 대전보건대학교, 한국폴리텍대학 등 대학교가 2개나 있다.
명석고등학교를 포함하여 초, 중, 고가 6개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간정사가 있는 우암사적공원은 널리 알려져 있어 탐방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우암사적공원은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편리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암사적공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박팽년 유허비가 있다.
공원 입구에 있는 이정표에는유허비까지 거리가 440m로 가까운 거리이다.
이정표를 따라서 박팽년 유허비로 발길을 옮긴다.
박팽년 유허비 둘레에 담장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려했으나, 출입구 문은 굳게 잠겨 있다.
담장 및 출입문 주변에는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접근하는 것도 편리하지 않다.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유허비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출입문 입구 오른쪽에 박팽년 유허비 안내판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본다.
박팽년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함께 사육신 중의 한 분이다.
박팽년선생유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이 태어나서 성장한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현재 동구 가양동)에 있는 집터이다.
박팽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종 16년(1434) 알성문광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했으나, 김질과 그 장인 정창손의 고발로 발각되어 국문을 받은 후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후 현종 9년(1668) 4월에 송시열이 회덕박선생유허비(懷德朴先生遺墟碑)에 그의 생가 터가 황폐되어 알아볼 수 없고 정자 주춧돌만 논 가운데 남아있다고 기술했다.
1672년 유림들이 박팽년을 추모하고자 하는 뜻을 모아 회덕현의 물자 지원을 얻어서 정자를 복구하였다.
정자에 장절정(壯節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 동쪽으로 100보 떨어진 지점에 직절당(直節堂)이라는 재실을 지어 제관(祭官,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재결(齋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함)하는 장소로 삼았다.
현재의 비각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6대손 박상동이 고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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